현고학생부군, 현비유인○○○씨. 전통식 가정 제례에서 부모의 위패에 쓰는 글자다. 학생은 문자 그대로 ‘공부하는 사람’이고, 유인(孺人)은 조선시대 종9품 외명부 품계명이다. 본래 학생과 유인은 공명첩도 살 수 없었던 평민 부모의 위패에나 들어가는 글자였다. 제 이름 석 자조차 못 쓰는 사람도 죽으면 학생이 되었고, 그 부인은 남편보다 높은 유인이 되었다.
신분제 시대 절대다수 사람들에게 신분 상승은 죽어서나 이룰 수 있는 꿈이었다. 그러나 생전에도 잠깐이나마 그 꿈이 실현되는 때가 있었다. 바로 혼례일이었다. 이날 신랑은 농사꾼이라도 당하관 관복을, 신부는 장사꾼의 딸이라도 비빈(妃嬪)이나 공주가 입는 원삼을 입을 수 있었다. 혼례일의 신분 상승 폭도 신부가 신랑보다 컸다.
이른바 서양식 결혼식, 또는 신식 결혼식은 한동안 신랑 신부에게서 순간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빼앗았다. 대신 그들은 유사 서양인이 되는 경험을 했다. “요사이 청춘남녀의 결혼식에는 모든 것이 영어 이름으로 불립니다. 브라이드, 브라이드그룸, 베일, 웨딩링, 프록코트, 넥타이 등. 조선 이름이라고는 신부 신랑의 이름뿐이랄까?”(<별건곤> 1호. 1926.11.)
이 땅 최초의 신식 결혼식은 1889년 3월에 거행된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호튼의 결혼식이었다. 두 달 뒤 이화학당에서 박유산과 김점동이 한국인 최초로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기독교인들의 결혼식은 대개 예배당에서 신식으로 치러졌다. 1920년대부터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신식 결혼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다른 종교 교당, 공회당, 무도관 등이 결혼식장으로 사용되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의례준칙’을 제정한 뒤로는 전문 예식장도 생겨났다.
해방 후 전문 예식장은 급격히 늘어났고, 신식 결혼식과 구식 폐백이 한 장소에서 연속되었다. 1990년대 이후 예식장들은 유럽의 왕궁 모양으로 외양을 꾸몄고, 신랑 신부의 폐백 의상은 왕과 왕비의 복장으로 바뀌었다. 현대 한국의 기혼자들 상당수는 예식장과 혼례풍속 덕에 왕과 왕비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와 자기 자식뿐 아니라 남과 남의 자식도 왕·왕비와 왕자·공주라는 사실은 자꾸 잊어버리는 듯하다.
- 전우용_ 역사학자 -
Notting Hill_ When You Say Nothing At All